Chapter: 219
여기에 나오는 몬스터들이 약하다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. 어차피 경험치를 포기한 이상 일이 쉽게 풀리는 쪽이 나에게 이득이니까.
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.
던전이 아니니 무언가 변수가 생길 이유가 없고.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도 내 지식과 별 다를 바 없었지만 그럼에도 난 도저히 안심을 하지 못했다.
왜냐고?
이 세상에 떨어지고 난 후에 무언가가 내 생각대로 됐던 적이 었었던가? 무언가가 쉽게 해결된 적이 존재했던가?
그런 적 따위는 없었다.
나는 언제나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두어야 했다.
언제나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내 앞을 가로 막았고, 갑작스레 등장한 적이 내 멱살을 부여잡았지.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.
나라는 인간은 무수히 많은 위기를 극복하고서야 간신히 이 곳에 서 있을 수 있었다.
그래서일까. 난 이런 평화와 평온을 마냥 기뻐하는 게 불가능했다.
갑작스레 띠링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?
어디선가 갑자기 던전이 출현하지 않을까?
루카가 해 놓은 개수작질이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?
아니면 이 숲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변수가 존재하지 않을까?
그런 불안들이 자꾸만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들었다.
‘이젠 차라리 뭔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에요.’
차라리 무언가 일이 생긴다면 그걸 해결하면 그만이다. 분명 위험해질 터이고, 어쩌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지만, 이렇게 마음을 졸일 필요는 없을 것 아닌가.
<그대도 인간이었구나.>
불안을 해소할 데가 마땅치 않아 투정을 부려 보았더니 할배가 이렇게 중얼거렸다.
‘그건 도대체 무슨 소리에요?’
저는 언제나 인간이었거든요? 커뮤에 썩은 인간도 아니고. 썩은물을 인간이 아닌 무언가 취급하시면 저 화 냅니다? 진짜 진심으로?
<농이다. 농. 긴장을 풀라는 거지.>
‘할아버지. 농담 진짜 못하시네요. 부하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훤히 보여요.’
<무슨 소리를. 다른 성기사들은 내가 한 마디만 하면 웃다가 쓰러질 지경이었다.>
‘부하말고 동료분들은요?’
<…그 놈팽이들과 성기사와 감성이 많이 다른지라.>
‘접대 받은 거 맞네요.’
실적, 능력, 권력 이 세 가지 모두를 지닌 꼰대 부장님이라니.
끔찍하군.
분명 성기사단 어딘가에 할배 욕이 적힌 기둥 같은 게 있을 거야.
자신은 좋은 윗사람이었다는 할배의 주장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다.
세 번째 보스는 두 발로 걷는 머리 둘 달린 개였다.
애완동물 주제에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고 이빨을 들이밀기에 메이스로 몇 번 교육을 해주었더니 바닥에 쓰러져 버렸지.
네 번째 보스는 시체 썩은 내가 나는 꽃에서 피어난 마녀였다.
자신이 지닌 줄기로 상대를 묶고, 마법과 독, 저주로 공격을 하는 이 녀석은 본래라면 상당히 까다로운 존재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아니었다.
마녀의 줄기는 내 몸을 묶을 만큼 튼튼하지 못했고.
녀석의 마법은 내 방패를 뚫지 못했으며.
독은 내 몸을 침범하기도 전에 정화되었으며.
저주는 애초에 다가오지도 못했다.
처음에는 기세등등하다가 점점 경악으로 물드는 얼굴에 메이스를 꽂아 넣어주니 마녀는 머잖아 흩어져 버리고 말았지.
신성에 불타 재가 되어 완벽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그 가운데에서 씨앗을 주워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.
나중에 아드리한테 가져다줘서 저주를 없애면 쓸 구석이 생기니까.
이제 마지막이다.
이 숲을 죽음으로 물들인 녀석.
한 때 사령술사였으나 죽어서 혼령이 되었고 다시금 살아나기 위하여. 복수를 위하여. 남겨두고 온 것을 찾기 위하여. 생기가 가득한 숲으로 찾아와 이 곳을 지옥으로 만들었고, 그 생기를 빨아들이다 미쳐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자.
사령술사.
이 숲을 지배하는 저의 부하 넷을 잡아 죽였으니 이제 한 가운데에 저가 모습을 드러내겠지.
숲의 가운데로 발을 옮기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거대한 죽음의 기운이 생겨나 주변으로 퍼졌다.
저 기운은 여태까지 내가 상대해왔던 것들과는 격을 달리했다. 밤의 장막보다도 짙은 검은 마력을 타고서 원념이 전해진다.
원망 어린 목소리가. 산 자를 저주하겠다는 의지가. 미쳐버린 후에도 남아있는 강해져야 한다는 간절함이.
<괜찮으냐?>
‘네. 뭐 이 정도야.’
그를 몸으로 받아냈지만 내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. 부정이 담긴 기운은 이 몸으로 파고들기도 전에 내가 지닌 신성에 정화되어 버렸으니까.
<꽤 강한 녀석이다.>
‘그런 것 같네요’
역시 찐 보스님이다.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만한 위압감이라니. 미친 게 아니었더라면 까다로운 상대였을 거다.
커뮤에서 대체 그 때의 신성기사단은 무슨 괴물들이기에 저 사람을 쓰러트린거냐. 라는 이야기를 듣던 분답네.
<자신 있느냐?>
‘그래봐야 악신에 비하면 약해빠진 적이잖아요?’
악신은커녕 카리아와 비교하는 것도 민망한 상대다.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다.
<그것들과 비교하는 것은 상대에게 좀 너무하다 싶다만.>
‘그런가요?’
<애초에 말이다. 당장 그 때의 카리아보다 강한 사람이 이 대륙에 몇이나 되는가.>
그것도 그런가. 말하고 보니 비교대상이 너무하다 싶네.
그러면 으음. 아 그래.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확하겠다.
상황과 여견이 갖추어 진다면 나를 제외한 아카데미의 내 친구들. 아서. 조이. 페이비. 프레이. 이 네 사람이 사냥할 수 있는 상대.
페이비가 대 언데드 전에 완벽히 특화되어 있기에 그녀가 원혼을 정화할 시간을 벌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 크긴 하지만 그것도 이기는 건 이기는 거잖아?
확신을 담아서 이야기할 수 있어. 이 숲의 사령술사는 겨우 그 정도 상대야.
무언가 변수가 없다면 내가 그런 놈한테 질 리가 없잖아?
문제는 변수가 있을 경우다만. 어지간한 녀석이라면 지금의 나로도 대처할 수 있을 거다.
진짜 최악의 경우가 찾아와서 도저히 나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난다면…
뭐. 그 때는 허접 주신이 어떻게든 해주지 않겠어? 자기가 준 시련이니 최소한의 책임정도는 져주겠지.
만약 그 최악의 상황이 루카의 노림수가 아니라면 루카가 나를 지켜줄 테고.
진짜 대책 없네.
그런 생각이 들어 키득거리면서도 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.
앞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검은 색의 마력이 점차 짙어진다.
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마력에 숨이 막혀 질식해버렸을 만한 농도.
안개를 해쳐나가듯 무작정 그를 지나가다보니 어느새 난 중심에 도달해 있었다.
그제야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존재했다.
숲에 퍼져나가던 검은 색의 마력이 사령술사가 의도적으로 흘린 게 아니라 자신이 조절하지 못해 흘러나오는 것 뿐이었다는 사실.
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진정한 주인의 모습에 사령들이 몰려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.
모니터 너머로 볼 때와 자신의 눈으로 볼 때의 위압감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.
심호흡을 하며 몸 전체로 신성을 흘려보낸다.
성격은 괴상하지만 지닌 능력 하나는 진짜인 주신이 내린 신성이 내 몸을 휘감으며 주변의 어둠을 내쫓는다.
검은 색으로 가득하던 장소에 하얀 점이 생겨나니 그 곳에 도사린 모든 것들의 시선이 이 쪽으로 몰린다.
그 시선에 담긴 경악과 증오를 마주하면서 속으로 신성마법을 되뇌인다.
신성이 강화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능이 올라간 여러 버프기들.
오랜 시간 숲을 돌아다닌 몸에 활기가 차오름과 동시에 예민해진 감각이 사령의 목소리를 귀로 끌어들인다.
– 성기사다.
– 성기사야.
– 여기가 어디라고 이 곳에 오는가.
메이스를 붙잡은 손에 힘을 더하고.
– 잘 됐어. 괴롭히자.
– 죽이자.
– 아냐. 고문해야 돼.
– 비명소리를 들어야 돼.
– 살려달라고 빌게 만들어야 돼.
– 같은 사령으로 만들어야 돼.
방패에 달린 가죽 손잡이를 부여잡고.
– 모두 조용히 해라.
눈을 감았다가 다시금 위쪽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.
아래를 내려다보는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와 위를 올려다보는 붉은 색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한다.
–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성기사야. 짓밟아버리면 사라질 것 같은 꼬마아이야. 네게 물어보고픈 것이 있다.
잔뜩 쉬어서 썩어 문드러진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. 그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렵지만,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다.
“뭔데?♡ 말해봐 치매 아줌마♡ 난 착하니까 정신병자의 이야기라도 들어줄게♡”
– 아드리라는 아이를 만났느냐.
그리고 그 내용은 내가 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.
앞으로 몇 가지 대화를 더 나눠보아야 확정지을 수 있겠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다.
이 사령술사는 게임 속과 별 다를 것이 없다. 내가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.
“궁금해?♡ 엄~청 궁금한 거야?♡ 잠시만 생각을 좀 해볼게♡ 난 허접한 잔챙이들은 잘 기억하지 못 하거든♡”
– 잘 생각해내라. 그대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.
“아!♡ 생각났다!♡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외톨이 할망구!♡”
내가 목소리를 높임에 따라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던 사령술사의 눈에 붉은 색의 점이 새겨진다.
저것은 이성의 증거다. 잠시나마 대화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.
과거 내가 아드리에게 리본을 선물하면서 받았던 스킬이. 그 안에 머무르고 있는 아드리의 힘이. 이 사령술사에게 이성을 되찾아 주었다.
그래.
이 사령술사는 아드리의 부모.
과거 신성기사단에 의해 토벌 당했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혼만큼은 보존해 도망친 자.
그리고 이 숲으로 찾아와 복수와 구원의 계획을 짠 사람.
최후에 사령의 원념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린. 이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. 영혼이 닳고 닳아 주신의 품에도 안기지 못하는 존재.
사령술사 애비나.
– 아드리. 아드리를 보았느냐?! 그녀가 살아있느냐?! 대답해라! 대답하란 말이다!
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여전히 딸의 이름을 부르짓고 다니는 불쌍한 어머니.
내가 저번에 이 퀘스트가 연계 퀘스트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재평가 됐다는 말을 했었지?
그게 이런 이유야. 아드리 관련 퀘스트를 수행한 후에 이 쪽으로 오면 개같은 노가다 퀘스트가 갑자기 감동적인 스토리로 변모하거든.
어머니의 모성에는 사람을 울리는 힘이 있다나 뭐라나.
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아직도 공감 못 하겠어. 고아로 태어나 자란 인간이라 모성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거든.
최근 본의 아니게 부성이라는 건 느끼긴 했다마는.
뭐 이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니까 넘기고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면.
“응!♡ 봤어!♡ 어디 있는지도 알아♡ 근데 대답 안 해줄 거야♡”
나란 놈은 전후사정을 다 알고도 사령술사를 도발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거.
– 뭐?
“그치만 아줌마 머리 나빠 보이고♡ 내가 대답해도 기억 못 할 것 같은 걸♡ 그러니까 아무 말도 안 해줄래♡”
– …알겠다. 그렇다면 말하게 만들어주도록 하마.
진득한 원념이 담긴 목소리가 나를 향해 쏘아진 순간 내 몸 속에 고양감이 차오른다.
아. 참. 한 가지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.
숲 한 가운데에 도착해서 사령술사를 마주한 순간에 깨달은 건데.
이 녀석 정도면 몸풀기는 될 것 같더라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