Chapter: 594
검을 다잡고서 앞을 보면 여느 때처럼 자연체로 서 있는 형님이 보인다.
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태도는 얼핏 거만해 보이지만 저건 그런 게 아니다.
당연한거다. 자신의 눈 앞에서 파리가 날아다닌다고 긴장하는 이가 어디에 있는가. 형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는 그러한 종류다.
– 이길 수 있겠냐?
“절대 못 이기지.”
예전과는 마음을 달리 먹고서 이래저래 발악을 해왔다.
루시 알른을 상대로 단 한 번이라도 이기기 위해서. 프레이 그 녀석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.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. 최선을 다해 내달렸다.
허나 이러한 노력의 원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당연하게도 한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.
르네 솔라딘. 솔라딘의 1왕자.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재이며 나의 형님. 내가 넘어서야 할 목표.
– 어느 하나 넘지도 못한 채로 벽만 잔뜩 만드는 건 네 취미냐?
“…그렇게 비꼬지 마라. 나도 벽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다.”
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. 그런데 갑작스레 눈 앞에 벽이 여럿 생겨났을 뿐이다.
애초에 프레이는 벽도 아니다. 아직 난 추월당하지 않았어.
– 진즉에 추월당했다고 생각한다만.
조각의 말을 흘려듣고서 앞으로 나아가자 형님이 상쾌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든다.
“준비는 끝났느냐?”
“예. 그렇습니다.”
“핸디캡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미리 말해다오. 어지간한 건 다 수용해주마.”
“괜찮습니다. 이대로도.”
“…정말?”
“작은 형님과 맞붙으실 때는 핸디캡같은 단어 안 말하시잖아요?”
“그건 걔가 멍청해서 그래. 자기가 박살나건 말건 전력을 다해야 포기하거든.”
“저도 멍청해졌습니다.”
단호히 말하자 형님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눈웃음을 지었다.
“하아. 정말 싫다.”
전조는 없었다. 깨닫고 나니 어느새 형님이 눈앞에 있었다.
날 없는 검이 내 머리를 노리고서 날아든다.
오러는 없다.
그렇다면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.
바람의 장벽으로 검 속을 늦추며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.
자세를 잡기 무섭게 검이 내 머리에 닿지만 충격은 적다.
버틸 만하다.
“확실히.”
검 끝에 오러를 끌어모은다.
그리고서 내 육신 전체를 포대로 삼아 검을 내지른다.
단순한 찌르기를 넘어 화살의 속도조차도 앞질러서 상대에게로.
“멍청해졌네.”
검 끝에서 전해지는 감촉은 내 최속의 찌르기가 제대로 먹혀 들어갔노라 말하고 있었다.
루시 알른의 방패를 꿰뚫기 위해 만들어낸 속도는 헛되지 않았다.
– 안심하지 마라.
말하지 않아도 안다. 형님이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을 거란 건.
“설마 공격을 받아내면서 반격할 줄은 몰랐어.”
“살의가 없으셨으니까요.”
“꽤 속도를 냈었는데도 그게 판별이 됐어?”
“빠르기에 집착하는 짐승이 제 옆에 하나 있어서.”
프레이 켄트에겐 적당히라는 단어가 없다. 그 녀석은 언제나 날 죽일 기세로 검을 휘두른다.
그 폭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때에 비하면 방금 전의 검속은 별 것 아니다.
“이번엔 먼저 와볼래?”
“기꺼이.”
오러를 통한 육신의 강화. 바람의 마법을 통한 속력의 증가. 여기에 더해 프레이와 놀아주며 얻은 켄트의 보법까지.
모조리 뒤섞어가며 앞으로 달린다.
바람과 함께 달리는 게 아니다. 전력을 다해 바람을 꿰뚫는 거다.
연습할 때보다도 빨라졌을지 모른단 생각에 환희하며 다시금 찌르기를 사용한 순간 안 쪽에 형님의 검이 파고드는 게 보였다.
“썼던 걸 다시 사용하면 안 되지. 적어도 내 앞에선.”
초속이 파훼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샌다.
이것이 형님의 특기. 형님께서 천재라 불릴 수 있었던 까닭. 이미 하나의 축복이라 불러 마땅한 수준의 분석력.
“첫 일격으로 날 쓰러트렸어야지.”
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둘 정도로 여겨진다.
하나는 분석할 틈도 주지 않고 형님을 쓰러트리는 것.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분석이 의미가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.
난 이미 전자에 실패했고 후자를 실행할 힘도 없다.
예전이었다면 여기서 항복을 선언했으리라. 이 이상 검을 나눠봐야 결과가 어찌 될지 뻔하다 여겼으니까.
지금은 아니다. 승기가 없어도 달려들 거다. 그 끝에 기적을 붙잡아내는 녀석의 등을 몇 번이나 봤거든.
그 녀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나이다만 꼴에 친구인데 쉬이 포기해서야 면이 서지 않는다.
“계속 가겠습니다.”
내가 둘 수 있는 수는 아직 많다.
물의 마법을 담아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시야를 가로막고 공격하는 체하며 대지 계열 마법으로 발치를 묶으려 했지만.
마법이 빗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물의 장벽에 오히려 내가 기습을 당할 뻔했다.
물 안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영문도 모른 채 공격을 당했을 거다.
“언제까지 할 생각이더냐?”
이번엔 불의 마법을 실어서 검격이 스쳐 지나간 부분까지도 익혀버릴 계획을 세웠다만 내가 낼 수 있는 출력으로는 형님의 육신에 해를 끼칠 수 없었다. 옷자락을 태우는 게 한계였다.
“이 정도로 내게 닿을 수 있을 성 싶으냐.”
그 뒤로도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형님은 너무도 간단히 내 잔재주를 파훼했다.
똑똑한 사람과 대련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렵군. 멍청한 녀석과 계속해서 대련을 한 게 문제인가.
뭐. 좋다. 이걸로는 안 된단 걸 알았으니 다시 정석으로 돌아가자.
상상하는 것은 프레이의 쾌속이 아니라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기사의 일격.
밤조차 붕괴시켜버릴 압도적인 폭력.
그 기사의 검은 나 따위가 펼치기엔 너무도 무겁지만 여러 잔재주를 섞으면 열화의 열화판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.
“가자.”
– 겨우 이런 곳에서 쓰긴 아까운데.
다른 이들의 시선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. 타인을 향한 증명 따위도 마찬가지다. 어머님께선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셨으니 자기만족이면 족해.
“가자!”
타인을 흉내내어 도달한 결과라도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정답인 거다!
– 상대가 상대라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해. 그것만 알아둬.
솔라딘의 피에 담긴 힘.
긴 세월이 지나 이제는 흐려진 힘.
동화.
에르기누스님의 개조에 의해 여러 제약이 풀린 조각은 내 피에 담긴 이 힘을 이끌어 내 줄 수 있다.
“가자아아아!”
검이 내리쳐진다.
오롯이 폭력으로 가득 찬 괴물의 검이 상대에게로 향한다.
앞을 가로 막는 모든 걸 부수어버릴 압도적인 힘이 앞으로 나아간다.
그러자 처음으로 형님의 검에 오러가 실렸다.
요정의 숲에서 보았던 검정보다도 진득하고 기분 나쁜 검은 색의 오러가.
그리고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난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.
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.
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킨 나는 내 시야를 가리는 붉은 빛 액체를 보고 웃음을 흘렸다.
누군가 본다면 미친 놈이라 부를 게 훤했지만 어쩌겠는가.
형님이 날 상처입혔다는 말은 곧 그러지 않고서는 날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단 것인데.
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다시금 검을 쥔다.
눈을 크게 뜬 채 날 바라보는 형님을 마주한다.
그리고 다시.
“끕!?”
달려가려다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.
누구냐. 어떤 건방진 녀석이 왕자 간의 대련에 침범하려는 게야. 내 권위를 휘두르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만 이번만큼은.
“…루시 알른?”
“제가 오는 것보다 먼저 코피를 뿜고 계시다니. 절 얼마나 좋아하시는 건가요?”
“대뜸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가짜는 아니군.”
“당연하죠.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 둘이나 있으면 큰일이 난답니다?”
뒤쪽으로 고갤 돌리면 알른 백의 주변을 둘러 싼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사들이 보인다.
이건 뭐라 하기도 어렵군. 알른 백이 움직이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.
“하아. 그래서 여긴 뭘 하러 온 거냐.”
“누가 제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 한단 이야기를 들어서요.”
루시 알른은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적을 바라볼 때처럼 살벌했다.
젠장.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겠군.
“어이. 루시 알른. 이건.”
좀 진지한 대련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손을 타고서 내 몸 안에 신성이 흘러들어왔다.
루시 알른의 치유가 투박하단 걸 알기에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여느 때와 달리 그녀의 치유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.
“너.”
빠르게 사라져가는 고통에 놀라 고갤 든 아서는 그제서야 지금의 루시 알른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.
달에서 내려온 것이 분명한 여신의 형상을. 태양 아래에서도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기적을.
거기에 홀려버린 아서가 멍하니 있는 동안 앞으로 나아간 루시 알른은 르네의 피 묻은 검을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.
“요즘 나들이가 잦으시네요. 음침 왕자님♡ 발정기가 되신 건가요?♡”
불경하다는 단어조차 핑계가 될법한 발언에 아서는 물론이고 대련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르네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.
“슬슬 결혼할 때가 되긴 했죠.”
“역시 그런가요?♡ 수컷은 발정기가 되면 사나워진다던데 책에 적혀 있던 게 맞았네요!♡ 음침 왕자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수컷이셨군요♡”
“책은 지식의 보고이니 말입니다.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. 실로 존경스럽군요.”
“아핫♡ 이런 소리를 들어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여자가 간절하신가요?♡ 그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처럼 기어다니면서 부탁해 보세요♡ 처량한 꼴을 보면 쪼오끔은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요?♡”
“하하. 그건 좀 곤란하군요. 제게도 체면이란 게 있는지라.”
“와아♡ 정말요?♡ 음침왕자님을 만나고서 가장 놀라운 순간이네요!♡ 전 아래에만 뇌가 달린 줄 알았지 뭐에요!♡”
“…아래요?”
“생각해보니까 그럴리는 없겠네요!♡ 티도 안 나는 자그마한 곳에 뇌가 들어갈 리 없으니까!♡”
직접적으로 루시 알른이 그 단어를 말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시선이, 비웃음이 어디를 가리키는 건지 증빙했다.
대련장에 모인 전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 곳으로 향하자 르네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.
“이야기가 길어질 듯 한데 안으로 들어가실까요?”
“둘이서만 이야기하자고 꼬시는 건가요?♡ 풉♡ 작업거는 게 너무 어설프시네요♡ 이래서 동정내 풀풀 나는 인간은♡”
“그러는 영애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?”
참다 못한 르네의 반격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루시는 이내 웃음을 더 짙게 만들며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.
“제가요?♡ 푸하핳♡ 상상력이 빈곤하시네요♡ 하긴 젖내나는 마마보이가 뭘 알겠어요♡”
누가 보더라도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허세라는 걸 알 수 있는 태도였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이를 웃어넘기지 못했다.
“그. 그게 무슨 말이니. 루시.”
당장에라도 속을 게워낼 것처럼 창백해진 베네딕은 힘없이 주저 앉아선 온 몸을 떨었다.
“알른 백. 진정하시지요.”
“맞습니다. 저건 단지.”
“…누구냐.”
“예?”
“3왕자님. 당신입니까? 그렇군요. 그렇겠네요.”
“아. 알른 백? 무언가 오해를 하시는 듯 합니다만. 흐억!?”
베네딕의 주먹을 스치듯 피한 아서는 잠시나마 주마등을 마주했다.
저기에 맞으면 죽는다.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다. 그 자리에서 즉사해 위대한 주신을 만나게 될 터.
“뭐라는 거야. 변태 파파.”
루시가 거인의 종아리를 걷어차며 날 선 목소리를 내자 베네딕의 눈에 이지가 돌아온다.
“루. 루시! 방금 전에 한 말은 뭐니?”
“저 음침한 동정왕자를 놀리려고 한 말이지. 저기 얼굴 벌개진 한심한 꼴 좀 봐. 너무 허접이라 당분간 움직이지도 못 할 걸?”
“노. 농담인 거지?”
“당연하지. 난 바보파파를 가지고 놀 때 제일 즐거운 걸~♡”
“그치? 역시 이 파파가 제일 재밌지?!”
숨막힐 정도로 딸을 끌어안고서 몇 바퀴를 돈 베네딕은 짜증이 잔뜩 난 루시를 어깨에 올려둔 채 르네와 아서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.
그건 왕족 시해미수의 죄를 저지른 사람치고는 너무도 뻔뻔하고 한심한 모습이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