Chapter: 648
정화의 권능을 얻었는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할아버지가 대놓고 한숨을 내뱉었다.
<이전에 포용의 권능을 얻어봤으니 알 것 아니냐. 다룰 수 있는 영역이 다를 뿐 똑같은 권능이다.>
‘그…런가요?’
포용의 권능을 처음으로 사용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좀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어.
상대의 원망과 한탄마저도 끌어안아 주겠다 마음을 먹은 순간 자연스레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됐는걸.
그에 반해 정화의 기적은 전~혀 감이 안 와.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를 아예 모르겠어.
<이전에 기적을 펼칠 때는 잘만 하지 않았느냐.>
‘그건 단순한 기술이었으니까요. 따지고 보면 제가 뭘 한 것도 없어요.’
정화의 기적을 쓸 때 나왔던 기도문이라거나 내 몸 안에 흐르던 신성이라거나 그로 인한 현상이라거나 어느 하나 내 의지가 완벽히 반영된 것은 없다.
자의가 반이 있기나 할까 싶을 정도야. 이런 상황에서 기적을 펼칠 때처럼 하라 그래도 말이지. 석궁을 ‘딸깍’하는 거랑 활을 조준해서 쏘는 게 같냐고.
<그럼 세세히 지정을 하면 되지. 아그라의 권능을 정화하겠다고.>
‘맞네요. 그럼 되겠다.’
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고갤 주억인 나는 다시금 요정들에게 손을 가져다댔다.
그리고서 아그라의 힘을 정화하겠노라 결심을 하자 내 안에 있던 신성이 요동쳤지만 정작 내 신성은 세상에 그 어떤 현상도 만들어내지 못했다.
아그라의 권능에 정화의 권능이 가로 막혔어. 정확하게는 교황이 다룬 아그라의 권능에 내 권능이 짓눌린 거겠지.
‘할아버지?’
<어쩔 수 없는 일이다. 교황은 아그라의 조각을 취하지 않았나. 그 자가 다루는 권능은 악신의 것이나 다름없다 봐야지.>
‘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에요.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조언해달란 거죠.’
원래 보스는 유저보다 강한 게 정상이다. 유저와 비슷한 수준이거나 더 약하면 말이 안 되잖아.
게임이란 관점에서 벗어나도 교황이 나보다 강한 게 맞지.
신화의 시대부터 수백년을 살아 온 저 미치광이보다 내가 강한 게 말이 안 되잖아.
그렇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을 거야. 이전에 에르기누스가 말했듯 권능이란 건 좀 더 포괄적인 무언가니까. 정화의 권능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무언가 방도가 나오겠지.
<힘에서 밀린다면 좀 더 세세한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지. 아무리 튼튼한 것이라도 약점을 찔리면 무너지는 법이지 않으냐.>
‘세세하게. 군요.’
눈 위에 주저앉아서 고민을 이어나가던 나는 이윽고 바닥에 드러누웠다.
단적으로 말해서 막막했다.
정화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뜻은 ‘더럽거나 불순한 것을 깨끗하게 만든다.’ 다.
이전에 정화의 기적을 얻었을 때 찾아봤으니까 분명하다.
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.
오염된 호수에 본래의 깨끗함을 되찾아주는 것도 정화고, 어지럽혀진 곳을 청소하는 것을 정화활동이라 부르기도 하고, 불순한 마음을 품었던 악인에게 선한 마음을 선사하는 걸 정화라 하는데다, 영화같은 곳에선 외계인이 점령한 장소를 폭격하며 정화작전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하니.
누군가 판단하기에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들기만 하면 그게 무어라도 정화라 부를 수 있겠지.
그러니 정화의 권능이란 건 본래 다재다능하고 개쩌는 성능을 지닌 힘이라고 봐야 했다.
<그걸 알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.>
‘너무 포괄적이잖아요!’
그래서 더러운 것의 기준이 뭐고 불순한 것의 기준이 뭔데! 이걸 명확히 해줘야 할 거 아냐!
물론 더럽거나 불순한 게 뭔지는 알아.
짐승의 배설물이라거나 삼일쯤 철야를 한 내 방 같은 건 단호하게 더럽다고 할 수 있어.
밝히길 바라며 침대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얼빠여우라거나 남의 남편을 빼앗고 싶어서 부르기만 하면 쪼르르 달려오는 검성 같은 건 불순한 게 맞지.
내가 이야기하는 건 이런 게 아냐.
예를 들어서 지금 내 머리 위에서 미동도 안 하고 있는 요정들이 있잖아.
얘네들은 끝의 권능에 당해서 쿨쿨 잠을 자고 있어.
정확하게 이 녀석들의 어디가 불순한 건데?
어디를 어떻게 정화해야 아그라의 권능을 없애버릴 수 있는 거냐고.
<참 쓰잘데기 없는 걸 생각하는구나.>
‘쓰잘데기 없다뇨! 원래 이런 게 중요한 거에요! 이런 세세한 걸 따져야 빈틈을 파고들 수 있는 거라고요!’
당연히 그렇다에서 생각이 멈추면 안 된다. 그래선 다른 이들에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.
스피드런의 영역에서 1위를 차지하기 위해선 타인보다 뛰어난 피지컬과 운은 물론이고 이러한 발상력까지 지녀야만 한다.
처음에는 개쩌는 발상이라고 칭송받고 나중가면 모두 다 따라해서 의미가 없어지긴 하지만 원래 이런 건 최초로 남는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.
하여튼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 내 입장에서 정화의 권능이란 건 너무도 애매하게 느껴졌다.
<그냥 아그라의 권능에 대한 것만 생각을 해야지. 불순함의 개념으로 고민을 이어나가면 답이 안 나온다.>
‘그치만 불순하다는 걸 구분할 방법을 찾아내야 세세하게 파고 들 수 있다고요! 생각해보세요! 사람에 따라선 인간이 아닌 요정의 존재 자체를
부정하는 경우도 있다고요! 그런 사람이라면 요정을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!’
반쯤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반은 진심이다. 별 생각 없이 정화의 권능을 썼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.
요정의 장난기만 하더라도 꼰대 입장에선 불순한 거라고. 자칫 잘못하다간 그 장난기마저 정화할 수 있어.
‘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선 정확하게 무얼 정화할지에 대해 고민해야만 해요! 악신의 권능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하고, 제 권능이 어떤 것까지 할 수 있는지도 알아내야 한다고요!’
이런 내 외침을 들은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.
<그걸 정하는 게 너잖으냐.>
‘…넹?’
<이전에 포용의 권능을 사용할 때 네가 소리치지 않았나. 내 포용은 이런 거라고. 따지고 싶으면 자신에게 권능을 내려 준 주신을 무어라 하라고.>
‘그랬었죠?’
<똑같은 거다. 주신께서 네게 정화의 권능을 빌려주셨단 것은 네 재량이 맡기겠단 말 아니겠느냐. 네가 불순하다 생각하는 게 불순한 것이고 네가 더럽다 여기는 게 더러운 게야.>
나 자신이 판단기준이라는 이야기에 고갤 살짝 들었다가 이내 다시금 드러누웠다.
그럼 결국 내가 확신을 못 내리면 의미가 없단 소리잖아.
아악. 더 자신감이 없어졌어. 이대로는 정화의 권능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.
<아무래도 저 설원이 끝날 때까지 걸어야 할 운명인가 보구나.>
‘쭉 달리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죠?’
<기왕이면 짐승이길 빌거라. 그래야 배를 채울 것 아니냐.>
‘네? 왜 굳이 사냥을 해요? 먹을 거라면 잔뜩 있어요.’
지금 내 인벤토리 안에는 5인 기준으로 한 달을 버틸 수 있을 식량이 보관되어 있다.
중형 이상의 던전에 빨려들어갔을 경우를 대비해 넣어 둔 것들이지.
게임 속 텍스트를 보면 던전 안에 있는 마물들을 요리해서 먹는 경우도 있다는데 비위 상해서 그런 걸 어떻게 건드려?
<역시 네가 용사였어야 했다.>
‘설마 할아버지 던전에서 조난 당한 적 있어요?’
<말했잖으냐. 용사 그 놈이 길을 못 찾는다고. 몇 층짜리 던전에서도 그 꼴인데 수십층 이상 되는 곳이면 말할 필요도 없지.>
일단 먹어보고 아프면 못 먹는 것, 괜찮으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해야 했다는 할아버지의 말에선 짙은 짠함이 묻어나왔다.
할아버지의 고생담을 들으며 눈 산에서 내려온 나는 직감에 따라 무작정 발을 움직였다.
이전에 지겹도록 운빨을 느껴보았던 나다.
이번이라 해서 내 직감이 틀릴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.
눈밭을 걷는 것은 익숙했다. 알른 가문에서 지겹도록 훈련했던 것 중 하나가 눈 속에서 행군하는 일이었으니까.
푹푹 발이 빠지는 것쯤이야 별 거 아니었지.
근데 생각해보니까 굳이 이래야하나 싶더라고. 요정의 걸음으로 가볍게 밟으면 푹 들어갈 일도 없을 거 아냐.
실제로 시도해보니까 되더라.
그 때부터는 맨 땅에서 걷는 것처럼 내달렸지.
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걸 느꼈어.
어지간한 말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나오질 않는다는 게 말이 돼?
<이 곳이 진짜 본래 세상이 맞나?>
‘적어도 평범한 곳은 아닌 것 같네요.’
대륙의 지형은 모두 다 파악하고 있다.
근데 대륙에 있는 지형 중에서 내가 노을이 질 때까지 내달렸는데도 아무것도 안 나올 지형은 존재하지 않아.
여긴 무엇인가 잘못 됐어.
‘할아버지. 아그라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들어가 본 던전 중에 여기랑 비슷한 곳 있어요?’
<없다. 정확히는 불가능하다. 대체 이 정도 크기의 설원을 구현하려면 얼만큼의 힘이 필요하단 말이냐.>
‘그쵸? 저도 이런 던전은 본 적이 없어요. 그래서 두근두근하네요.’
만약 이 곳이 끝의 권능에 의해 한없이 늘어진 곳이라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.
그게 말이 되냐고? 죽음을 끝내서 영생을 살게 만드는 권능인데 던전의 끝을 없애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잖아.
누군가를 엿먹이고 싶은 사람의 입장에선 극한으로 효율적인 던전이네.
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영원토록 괴롭힐 수 있으니까.
공략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 던전의 정의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고 말야.
‘너무 열이 올라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거든요.’
그래. 너무 효율적이어서 역겨운 곳이지.
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노을이 지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왠지 모르게 이 곳의 끝을 되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.
요정들을 정화하려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.
난 진심으로 이것이 옳지 못하다 믿고 있었고, 이런 곳이 존재해선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으니까.
마음을 담아 이 곳이 올바른 형상으로 돌아오길 바란 순간 주홍빛으로 물들었던 설원이 자취를 감추고 갈색의 빛으로 물든 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.
잘은 모르겠다만 이 곳이야말로 올바른 세상이었다.
바람과 함께 콧가를 스치는 풀내음이 내게 그리 말했으니까.